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니토 무솔리니/생애 (문단 편집) == 침략으로 선회하다 == ||[[파일:Hitler_and_Mussolini_June_1940.jpg|width=100%]]|| ||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 베니토 무솔리니가 침략 노선을 본격으로 걷게 된 것은 1935년 3월, [[나치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재군비 선언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엔 무솔리니는 독일을 대상으로 한 승전국 간 연합 전선을 여전히 유지하고자 했고, 영국과 프랑스와 합의하여 대독 공동 대응 전선인 [[스트레사 체제]]를 형성했다. 그러나 그 직후 영국이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뒤통수를 쳤다. 이때부터 무솔리니는 기존 승전국과의 공조, 특히 영국과의 관계를 재검토했고 "어차피 나치 독일 재군비도 묵인했는데, 우리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하는 것도 넘어가 주겠지?"라는 생각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에티오피아]]는 당시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유일한 독립국이었기에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가 넘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침략 대상이었던 것이다. 또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 現 [[소말리아]] 중부와 남부.]와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고, 19세기 말에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하려다 패배한 것]]에 대한 명예회복의 필요성도 있었다. 이탈리아군의 무기는 외국에서 수입한 [[소총]]이 전부였으나, 아예 창과 칼로만 무장한 부대를 당시까지도 운용하고 있던 에티오피아군은 [[전차]]와 [[전투기]]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35년]]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자그마치 병력 50만 명으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1년간의 격전 끝에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았고 그 기념으로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 칭호를 얻었다. 이탈리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아 약 만 명이 전사했으나 무솔리니는 이에 대해 "파시즘을 강화하려는 희생으로서 전사한 만 명은 너무 적다."라고 말했다. 그래도 무솔리니는 자기 아들들도 여기 참전시켜 최전선으로 보내긴 했다. 문제는 에티오피아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와 영국, 프랑스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무솔리니의 예상처럼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묵인하긴 했지만, 이로 인해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점령에 대응하지 못하며 영프와 함께 구성했던 대독 공동전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어설픈 에티오피아 침략으로 이탈리아는 국제적 왕따가 되었고, 이런 외교상 고립의 탈출을 모색하던 무솔리니는 독일과 밀착하는 오판을 저지른다. 이후 무솔리니는 착실히 주변 파시즘 국가에 우호적인 행보를 보인다.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팔랑헤당]]을 편들며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이탈리아가 획득한 쥐트티롤 지방의 포기를 조건으로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인정하였다.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 위기 때에는 전쟁 직전에 중재자를 자처하면서 독일 측에 유리하게끔 [[뮌헨 협정]]을 성사시킨다. 1939년 4월에는 아드리아해 건너편의 소국 [[알바니아 왕국]]을 침공해 이탈리아의 [[사보이아 왕조]]가 알바니아 왕위를 차지했다.[* 이때 알바니아의 국왕 [[조구 1세]]는 중앙은행에 예치되어 있던 금괴를 빼내 영국으로 도망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